Past

도시 그림자
Shadows of the city
배남경 판화전 Bae, Nam Kyung solo exhibition
2013. 11. 21 (목) - 2013. 12. 10 (화)

작가노트

영원한 순간
'순간은 시간의 원자가 아니라 영원의 원자다. 시간에 투영된 최초의 영원이다. 곧 영원이 시간을 중단해 보려는 최초의 시도다. 순간은 시간과 영원이 만난 그 양의적인 것이다.'(키에르 케고르)

나는 삶의 현실적 단면 속에 영원한 가치가 만나는 '순간'을 구현하려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영원한 순간'으로 잘라내려는 것이다.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려봄으로써 그들의 삶, 사람, 사랑을 생각한다. 그리고 목판으로 각인(刻印)한다. 모든 현상(現象)은 변하고 소멸하는 것이어서, 보루(堡壘)로 세운 기억마저 언젠가는 희미해지고 그림조차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영원하게 남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림 한 장에 매달렸던 절실함 자체가 아닐까 믿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 예정된 상실과 영별(永別)로부터 오는 삶의 근원적 불안은 화면 속에 깊은 어둠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동시에 틀림없이 존재하는 빛의 요소는 삶에 있어 단 하나의 등대, 희망을 표상(表象)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빛날 것이다. 요컨대, 어둠 속에 빛이 빛나는, 현실 속에 이상이 비춰진, 시간 속에 영원이 투영된 '순간'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뭇결에 오버랩 된 존재의 결- 고충환



배남경의 판화는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듯 아련하고 아득하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신기루를 보는 듯 흐릿하고 모호하다. 그 때 그 곳에 그 혹은 그녀가 있었다는 실체감보다는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비현실적인 아우라로 그림을 감싼다.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오히려 암시력이 강조되는 편인데, 저마다의 감성의 결에 따라서 그림에 참여하고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열린 그림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미미한 흔적을 남기거나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덧없는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기억의 끝자락을 따라 겨우 딸려 나온 것들이 그림과 그림을 대면하는 주체를 특유의 정서로 감싸이게 한다. 작가가 세계를 보고 대하는 태도가 정서적인 형태로 반영되고 배어나온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그 태도며 정서가 관조적이다. 주변의 일가로부터, 개인적인 생활사의 언저리로부터 채집된 것이면서도 삶이며 일상이 어슷비슷한 까닭에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삶이 그렇고 일상이 그렇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명명백백한 현실을 사는 것 같지만, 그 현실은 시간의 풍화며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렇게 현실은 희미한 흔적으로 겨우 존재하다가 종래에는 그마저도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은 아름답다. 작가는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이며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붙잡아 한시적인 영원이란 모순어법 속에 붙박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현실이 아닌 현실의 흔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흔적은 어떻게 조형의 옷을 덧입는가. 배남경의 판화는 사진을 목판화로 재현한 것(물론 판각과정도 있지만 기본적으론)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보통 판화에서 사진의 차용은 흔히 사진제판법으로 알려져 있다. 석판화와 공판화(실크스크린)을 비롯한 동판화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목판화에서 사진제판법을 차용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만큼 성공적인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구조가 성근 목판에다가 사진을 전사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을 통해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독특한 색감이며 질감이 우러나오는 목판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흔히 사진의 질감(혹은 생리)과 목판화의 질감(혹은 생리)이 서로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는 선입견을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부연하면 판화는 회화에 비해 평면화의 경향이 강한 편이다. 보통은 색을 낱낱의 색판으로 분해한 후 이 색판들을 하나하나 중첩시켜 찍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원하는 색을 얻는 프로세스 탓이다. 배남경의 판화는 목판화이면서도 이런 평면화의 경향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는다. 특유의 기법(목판평판법)도 기법이지만 먹과 한국화 물감을 사용해 한지의 배면에 충분히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화물감(수성안료)을 수차례에 걸쳐 반복 중첩시킨 그의 판화에서는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은 먹의 색감이며 질감이 느껴진다.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간의 결이 느껴지고, 그림의 표면 위로 부각된 나뭇결에 그 시간의 결이며 존재의 결이 중첩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