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김세일 개인전
X-mass
2020. 10. 7[wed] ~ 10. 24[sat]

X1/ 2020/ 석고/ 12x12x30cm X15/ 2020/ 석고/ 10x10x52cm X16/ 2020/ 브론즈/ 15x15x62cm X12/ 2020/ 석고/ 9x8x13cm X52/ 2020/ 석고/ 10x20x3cm X25/ 2020/ 석고/ 19x25x5cm X10/ 2020/ 석고/ 10x10x35cm X10/ 2020/ 석고/ 10x10x35cm X8/ 2020/ 석고/ 10x8x30cm X9/ 2020/ 석고/ 10x7x28cm
X1/ 2020/ 석고/ 12x12x30cm
X1
2020
석고
12x12x30cm
“거꾸로” - 김세일의 조각미학


조각가 김세일은 90년대 표현적 밀도감이 충일한 목조작업, 2000년대의 촉각적 감수성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불가촉> 연작을 거쳐, 2010년대 중반부터는 매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시도한 <바람덩이> 연작을 선보였다. 40년 남짓 지속된 그의 작업에서 매스의 탐구는 단지 기법적인 측면, 달리 말해 하나의 오브제가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형상화될 수 있는지를 고안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사는 매스로 인해 환기되는 조형적 공간에 대한 느낌에 있다. 가비갤러리의 10주년 특별기획전 는 김세일의 조각이 추구해 온 매스의 조형미학을 작은 인체상을 통해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작은 인체조각에서 감지되는 매스는 무엇인가?
인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되었다. 목조작업에서 근자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인체는 그의 조각에서 늘 근간을 이루는 주제였다. 인체는 미술사의 가장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주제이지만, 실상 조각에서든 회화에서든 인체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면서 인체를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얼마나 엄청난 노력과 투쟁을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조각에서 가위로 오려내듯이 인체만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인체는 매스로 형태를 이루고 그것에서 촉발된 공간의 관계 속에서 조형적으로 재현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초역사적인 개념일 수 없기에 늘 변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렇게 변화했는지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형적 이유가 없다면, 미술은 그저 그렇게 제작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현대조각의 인체표현에서는 그 이유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기법적이거나 효과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감상자의 감각을 능히 후려칠 만한 형태를 보여주는 인체조각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는 고사하고 직관적이나마 느끼게 해주는 인체조각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새로운 조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미적 경험이 촉발될 수 있는 조형적 이유가 없으니 그저 설명으로만 파악되는 도식화되고 형식화된 인체조각만이 덩그러니 있는 경우란 얼마나 많은가. 김세일의 인체조각은 그 존재방식의 이유를 여실히 직관적으로 떠올리게도 하고, 때로는 그 직관을 넘어 개념에 이르기까지 감상자에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김세일 인체조각의 아레테(arete)이다.
그의 조각은 손에 잡힐 듯 작다. 미술사의 첫 페이지에 늘 등장하는 구석기 시대의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정도의 크기(11cm)인 인체상들도 여럿 된다. 김세일은 현대인이 구석기인보다 나을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하면서 그 자신은 여전히 원시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손에 쥘 수 있는, 그래서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크기에 매스의 어떤 본질적인 측면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덩어리는 만져지고 손으로 쥘 수 있다. 덩어리를 욕망에 비유하다면, 김세일의 조각에 나타난 매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의 대상으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손에 쥐어지는, 그러니까 가장 친밀한 촉각의 구체성으로 감지되고, 공간에서 그 형상이 마음에 떠올려지면서 조형적으로 표상된 욕망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세일은 원시인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지적이고 개념적인 원시인이다. 해부학적 지식을 조형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접목해서 자신의 고유한 조형성으로 이끌어내는 기법적 솜씨나 정신적 솜씨를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번 전시의 제목 만을 보더라도, 욕망과 매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아니, 제목을 떠나서 그의 작은 조각상들이 모두 ‘나의 매스는 나의 욕망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터이다. 욕망은 어떠한가? 욕망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물리칠 수 있듯이 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욕망은 철저하게 안에서 밖으로, 방어할 겨를도 없이 부단히 드러난다. 욕망의 분출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듯이, 분출 또한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조각기법과는 달리 안에서 밖으로 파낸 형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형상(eidos)이다. 안에서 밖으로 파내는 기법 그 자체도 감탄스러운 것이지만, 욕망이 조형성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체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놀라운 작업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욕망이 감지될 수 있겠다. 그러나 욕망은 인식될 수 없고, 합목적적일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욕망의 형상인 이 작은 인체조각상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인체상에 조각가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는 식으로 단순히 읽어내는 오역은 피해야 할 것이다. 오역은 치명적으로 이 작은 조각상의 생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 될 터이니 말이다. 부디, 이 작은 인체조각상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느껴보라. 저 아득한 태초, 언제인지 모르는 그 때부터 생명으로 약동하는 욕망의 근원적인 소리, 그 원초적인 언어를 몸으로 들어보라. 하여, 다시 ‘거꾸로’ 번역된 그 원시인의 욕망을 가까이 건드려 보라.
이번 전시에는 ‘거꾸로’ 작업하는 조각가의 설렘을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도 관람객인 우리들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흙을 안에서 밖으로 퍼낼 때,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다만 무엇이 조형적으로 형상화되고는 있으리라는, 그 우연의 기대에서 비로소 작품이 탄생한다. ‘거꾸로’ 조각을 해보겠다는 그 생각은 실존의 경계를 벗어나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조각가의 욕망에 따라 인도된 것이다. 그러기에 ‘거꾸로’는 기법이 아니다. 기법은 조각의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이 되지 못한다. 기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조각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은 위대한 조각의 전범을 보여주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카논>만으로 인체의 조형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현대조각의 추상성도 마찬가지이다. 추상이 기법적으로만 추동된다면 그 추상은 실상 도식적이고 형식적인 형태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은 더욱 어렵게 되었는데, 문제는 왜 그렇게 어렵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불투명하다는 데 있다. 조각은 너무 많은 옷을 입었다. 그 힘겨움에 버거웠을까. 조각가 김세일은 다시 인체를 돌아본다. 아니, 욕망을 생각한다. 말할 수 없는 X, 그 무엇을 조각한다. 매스는 그 무엇을 직접 설명해주지 않지만, 적어도 그 무엇을 투명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기는 한다. 그러기에 “X-mass”는 단순한 말장난(pun)이 아니라 다층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관계의 중력을 갖는 말이다.
조각사의 몇 장면을 보자. 조화의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전성기의 그리스 조각, 숭엄함을 간직한 중세 고딕성당의 문설주 조각상이나 생동감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도나텔로의 부조의 느낌, 그리고 로댕의 흙만짐에서 엿보이는 미완성의 미학 그리고 현대조각이 추구하는 추상적이거나 본질적인 또는 실존적인 인체조각의 상황들이 떠오른다. 김세일의 이 작은 인체상은 조각이 걸어 온 그 길들의 흔적을 수용하고 경외를 표하면서도 또 다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조각가의 열망과 ‘조각에의 기여’를 보여준다. 흉내내기 어려운 이 느낌, 따사롭고 원형적인 리듬을 자아내는 그의 조각은 허무와 함께 춤을 추는 듯 욕망과 함께 살아간다. 계산될 수 없는 그래서 예측불가능한 이 삶의 과정에 조각가 김세일은 ‘거꾸로’ 매스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본래적인 느낌, 그 설렘을 불꽃처럼 밝힌다. 욕망이라는, 그 제어할 수 있는 오류투성이가 매스를 노래한다. ‘거꾸로’ 부르는 노래는 낯설지만 사뭇 정겹다. _임성훈



작가프로필

김세일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9회의 개인전과 300여 회의 단체전을 통해 조각을 발표해 왔다. 2004년 선미술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