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이상길 조각전
Lee Sang Gill Sculpture Exhibition
이상길
2012. 8.22 (수) ~ 2012. 9. 11(화)

이상길/ Contact/ stainless/ 47x42x38cm/ 2011 이상길/ Contact/ stainless/ 39x17x40cm/ 2011 이상길/ Together/ stainless/ 3115x115x15,13x13x3cm/ 2011 이상길/ Contact/ stainless/ 110x105x18cm/ 2012
이상길/ Contact/ stainless/ 47x42x38cm/ 2011
이상길
Contact
stainless
47x42x38cm
2011
작가노트

한 점, 한 점, 한 점
하늘을 담았다.

한 점, 한 점, 한 점
서로 어우러져 반짝인다.

한 점, 한 점, 한 점
그릇이 되었다.

2012.07.05
이상길



Artist Statement

안테나와 레이더, 우주를 향한 그리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칠흑같이 새카만 밤에 보석같이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볼 때면 불현듯 살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진다. 저 별들 중에 한 별에서 누군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신기해할까. 비록 인간과 같지는 않겠지만, 인간과는 다른 생명체가 분명 어느 별엔가 살고 있을 것이다. 생명체가 살고 있는 별이 지구가 유일하다고 믿기에는 별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심경을 작가 이상길은 우리뿐인가라는 부제에 담아냈다. 우리뿐인가? 우리뿐일 리가 없다는 반어법처럼 들리는 이 반응 속엔 호기심과 당혹스러움과 바람이 들어있다. 우주로 대변되는 미지의 세계와 교신하고 싶은 열망과 함께, 알고 보면 자신 또한 미지의 세계에 내던져진 한 존재일 수 있다는 자기인식이 어떤 쓸쓸한 정감을 자아낸다. 막막한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도는 미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의식과 자각이 고독감을 불러일으킨다. 고독하다는 것은 고고하다는 것이고 고요하다는 것이고 쓸쓸하다는 것이고 투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복합적인 심경은 하이데거가 실존적 인간을 언급할 때 예시된 바 있다. 그 예시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지와는 무관하게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다. 이처럼 인간이 최초로 내던져진 미지의 세계는 바로 자궁 속이다. 그리고 자궁은 매트릭스고 우주다. 인간은 우주 속으로 태어나서 재차 우주로 되돌려지는 존재이며, 고독과 더불어 세상에 입문해서 다시 고독 속으로 사라지고 흡수되는 존재이다. 결국 우주는 거대한 고독이다. 그리고 우주며 고독 혹은 아예 고독한 우주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시종 접속을 통한 소통과 교신을 주제화한 이상길의 작업은 이 존재론적 조건에 맞닿아있고, 그 매개 역할에 해당하는 것이 우주며 우주를 향한 상상력이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 경우에도 사실상 접속이란 주제에 소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은 Contact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쓴 것인데, 이 말은 접속, 접촉, 소통, 교신, 교감,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로써 적어도 주제와 관련해 볼 때 작가의 작업은 나와 너의 관계 곧 주체와 타자간의 소통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와 나의 관계 곧 일종의 진아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런가하면 나와 우주의 관계 곧 우주와의 교신과 교감을 표현한 것이며, 지와 미지의 관계 곧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는 다만 미지의 세계를 환기시키고 암시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에 작업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는 고독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 막막한 우주에 저 혼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작가는 어느 별엔가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교신하고 싶어서,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요량으로 전파망원경을 만들었다. 전파망원경은 바깥쪽이 넓고 안쪽이 좁은 거대한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다. 깔때기는 외계의 모든 것들을 자기 내부로 빨아들이고 흡수하기에 용이한 구조를 하고 있고, 이런 구조 탓에 분과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 모두 자기 내부에 합류해 들이는 통섭의 인문학적 메타포 같다. 더욱이 작가의 주제의식이 이질적인 것들을 네트워킹하고 차이를 봉합하는 계기로서의 접속이며 관계가 아닌가. 해서 깔때기의 형태며 구조는 그 의미가 우주와의 접속과도 통하고, 동시에 통섭으로 나타난 인문학적 성찰과도 통한다. 비록 조형물 자체는 우주와의 교신이며 교감을 위한 장치이지만, 이를 통해 은연중에 동시대적 담론과도 접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이처럼 그 가능성을 탑재한 깔때기 모양의 망원경은 겉과 속이 다르다. 가녀린 스테인리스스틸 봉을 촘촘하게 감아올려 만든 어둑한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이어진 띠와 용접자국이 마치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유성 같다. 셀 수도 없는 유성들이 자기 뒤편으로 긴 띠를 그리며 흐르는 밤하늘의 장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아마도 외계인이 보내온 전파는 그렇게 연이어진 띠가 만들어놓은 섬세한 굴곡을 따라 더 잘 전송될 것이다. 그리고 조형물의 겉은 매끄러운 표면으로 마감돼 있어서 마치 거울처럼 외계의 모든 이미지들을 자기 표면에 반영한다. 아마도 우주 곧 하늘을 반영하는 한편, 하늘을 향한 작가 자신의 열망을 반영할 것이다. 속은 속대로 겉은 겉대로 우주가 보내온 정보를 각각 내부와 표면에 기입하고 기록하게 해주는 장치를 실현한 것이며, 우주를 향한 꿈과 이상과 상상력을 물질적인 형태로 구현해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우주를 향한 호기심을 전파망원경의 형태를 빌려 구현해놓고 있다. 여기서 방점은 전파보다는 망원경에 찍힌다. 우주로 상징되는 미지의 세계를 내다보고 엿보게 해주는 일종의 광학기계를 실현한 것이며, 말 그대로 우주를 향한 호기심을 질료의 형태로 옮겨놓고 있 는 것이다. 그러면 전파는? 전파망원경에서 보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면, 근작에선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지 하는 문제 곧 전파 자체며 보이는 것의 질료와 내용(콘텐츠?) 쪽에 무게중심이 실린다. 기왕의 전파망원경에 의해 촉발된 우주탐사(그 자체가 존재론적 탐색에도 통하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전파망원경과 근작은 서로 통하면서 다른데, 하나같이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형상으로 옮겨놓은 일종의 유사천문학이며 유사과학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하고, 그 외형이 깔때기 모양에서 원반 형태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근작은 거대한 원반 내지 접시 형태를 떠올리게 하고, 따라서 그 형태가 망원경보다는 안테나 내지 레이더를 닮았다. 우주로 상징되는 미지의 세계와의 교신을 위한 본격적인 송수신 장치를 제안한 것이다. 그 세부를 보면 전파망원경의 속과 마찬가지로 가녀린 스테인리스스틸 봉을 연이어 촘촘하게 감아올리는 과정을 통해서 그 최종적인 형태가 거대한 원반을 이루도록 마무리했다. 원반에는 자연스레 연이어진 원호들이 새겨지고, 그 원호들 사이사이에는 용접 자국과 함께 수도 없는 점들이 찍힌다. 가까이서 보면 옵아트를 떠올릴 정도의 규칙적이고 리드미컬한 패턴이 보이고, 그 패턴 사이사이에 박힌 점들이 밤하늘을 수놓는 별무리 같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들이 스스로 발광하는 광점 같고, 수면에서 깨알같이 흩어지면서 아롱거리는 반사광 같다.
한편으로 규칙적이고 리드미컬한 패턴은 시각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각적이기도 하다. 구심력 곧 원반의 중심을 향해 내달리는 운동성이 연상되고, 원심력 곧 가장자리를 향해 퍼져나가는 운동성이 감지된다. 비록 형태 자체는 고정된 것이지만,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그리고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끊임없이 그리고 미묘하게 움직인다. 그 자체가 정적이면서 동적인 밤하늘을 닮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를 닮았고, 그로부터 존재가 유래했을 우주적 자궁을 닮았고, 세계의 배꼽인 옴파로스를 닮았다. 끝도 없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파동과 파장이 전파의 질료적 형상화를 떠올리게 하고, 존재의 깊숙한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우주적 음을 떠올리게 하고, 맺힌 듯 흐르고 막힌 듯 통하는 기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징이나 심벌즈 같은 악기를 닮은 형태 역시 이런 우주적 음이며 존재론적 소리에의 연상 작용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을 가까이서 보면 전파가 보이고, 우주가 보이고, 존재가 보이고, 기가 보인다. 하나같이 밑도 끝도 없는 운동성의 와중에 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운율? 선율? 내재율?)가 들린다. 그리고 한발 짝 빠져 나와서 보면 비로소 형태가 보이는데, 정형의 형태가 보이고 비정형의 형태가 보인다. 정형의 형태가 코스모스(그리고 에토스)를 상기시킨다면, 비정형의 형태가 카오스(그리고 파토스)를 떠올리게 한다. 우주는 어둠에서 시작됐고, 존재는 카오스에서 유래했다. 빛 이전에 어둠이 있었고, 질서보다 먼저 혼돈이 있었다. 매트릭스 곧 우주적 자궁은 어둠 자체이며 혼돈 자체이다. 이런 의미심장한 의미는 차치하고 형태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때론 삐뚜름한 형태가 반듯한 형태보다 편하게 보일 때가 있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렇다.
어쩌면 이렇듯 비정형의 형태를 빌려서 작가는 밑도 끝도 없는 그리고 종잡을 수가 없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말하고 싶고, 비정형의 형태와 더불어서 정형의 형태를 보완하고 싶고, 삐딱하면서 편안한 존재의 태를 제안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에선 정형의 형태와 비정형의 형태가 대비되고, 반듯한 별들과 삐뚜름한 별들이 부닥치고, 규칙적인 전파와 불규칙적인 전파가 스며든다. 혹 지구인에게 규칙적인 전파가 정작 외계인에게는 불규칙적인 전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결정적인 상태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점에 작가의 작업의 미덕이 있다.